영동(永同)은 충청북도(忠淸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시대에 길동군(吉同郡)이라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 : 제 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 영동(永同)으로 고쳤으며, 서기 995년(고려 성종 14) 계주(稽州)로 승격시켜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1018년(현종 9) 상주(尙州)에 예속시켰다. 1413년(태종 13) 경상도(慶尙道)로부터 충청도(忠淸道)에 이관되
었으며, 1895년(고종 32) 영동군(永同郡)이 되고 1914년에 황간(黃澗)을 편입하였다.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에는 한때 영산(永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신라 제 31대 신무왕(神武王)의 넷째 아들
김익광(金益光)의 후예(後裔)로 전하는 영산 김씨(永山金氏)의 시조(始祖) 김영이(金令貽)는
고려조에서 전객시령(典客寺令)을 역임한 후 추충동덕보사공신(推忠同德保社功臣)으로 검교도첨의
찬성사(檢校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고 영산군(永山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그의 맏아들 길원(吉元)이 공민왕(恭愍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로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영산부
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영산(永山)에 세거(世居)하면서 김영이(金令貽)
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영산(永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초기에 명성을 날린 영산 김씨(永山金氏)는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고려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 : 오위도총부에서 군무를 총괄하던 정 2품 최고군직)을 지냈으며, 종경(宗敬)의 손자 수온(守溫)은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의 명신(名臣)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441년(세종 23) 문과(文科)에 오른 수온(守溫)은 중시(重試)를 거쳐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하고, 교서관 정자로 있으면서 세종(世宗)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부사직(副司直)에 올라 [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그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라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았으며,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고, 학문(學問)과 문장(文章)에 뛰어나 명(明)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나 항상 청빈하게 살았다. 1481년(성종 12) 병이 악화되어 운명이 가까워지자 자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부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많이 읽지마라. 내 이제 혼미한 중에서도 눈 앞에 서언한 것은 모두 중용과 대학의 글자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문에 깊이가 있었다. 당대의 석학(碩學) 구종직(丘從直)은 남의 표문(表文)을 써준 것을 보고 모래 위에 꿇어 앉으면서 "평일에 비록 공의 문장이 교묘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경지에 이를 줄은 몰랐오"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수온(守溫)의 형은 신미(信眉)라는 불명(佛名)으로 탈속하며
웅문거필(雄文巨筆)로 명성을 떨쳤으며, 속리산(俗離山) 성불사 (成佛寺) 복천암(福泉菴)에 사리(舍利)를 남기고 있다. 그밖의 인물로는 학행(學行)으로 의금부 도사(義禁莩事)에 천거되었던 곤(滾)과 뛰어난
효행(孝行)으로 감찰(監察)에 증직된 언건(彦建)이 유명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용궁 현감(龍宮縣監)을 지낸 각(覺)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득진(得進), 부호군(副護軍) 염근(廉謹)·호덕(好德) 등과 함께 충효(忠孝)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영산김씨(永山金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영산 김씨(永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3,597가구, 15,1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